성공/경력관리

[Cover Story] 이직 성공 사례 5人5色

daumstar 2006. 5. 24. 19:06

[Cover Story] 이직 성공 사례 5人5色
■Ⅰ. 안정된 미래 찾아 이직 - 이현숙 근로복지공단 서울지역본부 보상1부 사원■ 근로복지공단 서울지역본부 보상1부 이현숙씨(50). 이씨는 지난해 8월 경력직 입사 직원 중 가장 나이가 많다.

50세에 이직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같다.

그 동안 쌓아온 경력을 무시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씨는 “안정적인 미래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직에 미련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씨는 근로복지공단에 오기 전 원자력병원에서 23년간 근무를 했고 이후엔 몇몇 중소 규모의 병원에서 간호과장으로 일했었다.

“인사노무 컨설팅을 하는 남편은 이미 90년대 초부터 주 5일제로 일했어요. 그렇지만 간호사는 토요일뿐 아니라 일요일도 근무해야 하고 밤샘도 자주하죠. 이전부터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안정적인 근무시간을 보장하는 직장에 관심이 많았어요. 또, 작은 병원은 경영이 열악해지면 인원을 감축하는 등 미래가 불안한 경우가 많죠.” 이직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산재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선 근로복지공단에서 승인을 받아야 해요. 그래서 근로복지공단 홈페이지에 접속했는데 마침 채용공고가 났었죠. 그래서 한 번 지원해봤습니다.

” 지난해 근로복지공단 경력직에는 무려 1만6000명이 지원했다.

이씨는 최종면접 경쟁률 22대 1을 뚫고 당당히 합격했다.

이직 준비는 따로 하지 않았다.


그는 89년 대학원에서 보건학 석사 학위 취득 후 3년간 강의를 한 경험과 간호사 시절 주로 교육업무를 담당했기에 필기시험 준비는 따로 필요 없었다고. 입사 후 안 사실이지만 이씨의 경우 원자력병원 시절 호봉이 그대로 인정돼 급여도 별반 차이가 없다.

현재 이씨는 산재환자 진료비를 심사하는 업무를 맡는다.

25년여간 병원에서 임상의 전 분야를 다뤄봐서 업무에 많이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이씨는 현재 직장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

처음엔 직장 동료와의 융화 문제도 걸렸지만 이미 간호과장 시절 나이 많은 간호사들과 같이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상사의 마음을 잘 헤아렸다.

이씨 또한 모르는 사항이 있으면 물어보는 등 나이 어린 선배에게 굽힐 줄 알았다.

“간호과장으로 일할 때 50세가 넘는 나이에도 간호사로 일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래서 상사도 고충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죠. 저도 그런 상황을 겪어봤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마음가짐인 것 같네요. 정년까지 일할 수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Ⅱ. 공부해서 전직 성공 - 천세훈 BT코리아 부장■ “회사를 떠날 마음이 있다면 자리에 앉아있는 게 괴로운 법이죠. 이직할 마음이 생겼다면 바로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 천세훈 BT코리아 부장(37)은 이직을 생각하고 있으면 하루 빨리 실천하라고 말한다.

천 부장은 “생각이 많으면 고민을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그대로 주저앉는 경우도 많다”고 말한다.

말 그대로 천 부장은 35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MBA를 가는 등 일단 저지르고 봤다.

천 부장은 현재 BT(브리티시텔레콤)코리아에서 고객과의 거래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는다.

고객이 요청하는 서비스를 실무진에 넘기기 전까지 기술, 법률, 재무 등 모든 내용을 고객 욕구에 맞게끔 디자인하는 것. BT는 영국의 기간통신회사다.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글로벌 기간통신회사로 전 세계 3위권 업체다.

우리나라 KT와 같은 회사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현재 천 부장은 사업기획 업무를 담당하고 있지만 이전 경력은 현재업무와 무관하다.

BT에 오기 전 천 부장은 데이콤과 에릭슨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다.

그런 그가 진로를 바꾼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엔지니어는 30대 중반을 넘으면 살아남기 힘들어요. 대체로 40대 넘어가면 영업 등 다른 업무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죠. 그런 모습을 보니까 제 미래도 너무 뻔히 보이는 거예요. 술도 많이 먹고 건강도 잘 챙기지 못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고요. 진작부터 자기개발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죠.” 또 에릭슨에 있을 당시인 2002년 무렵, IT 불경기와 국내 사업 실패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경험했다.

천 부장은 “당시 살아남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더 더욱 자기개발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다”고 말한다.

MBA는 그런 이유에서 준비했다.

진로 선택의 길을 다양하게 넓히고 싶었던 것. 다행히 천 부장은 데이콤 시절부터 영어로 업무처리를 자주해서 영어에 대한 공포심은 없었다.

에릭슨으로 이직하면서 영어 실력을 높이려고 GMAT을 준비했다.

꼭 MBA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그간에 해오던 것들이 MBA 준비에 도움이 됐다.

천 부장은 2년여간 준비를 거친 끝에 2004년 9월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MBA는 나이와 학비를 감안, 1년 과정에 기숙사도 제공받는 더램(Durham)대를 선택했다.

MBA를 마친 후 직업을 구하는 도중 한 헤드헌터로부터 BT에 대한 권유를 받았다.

면접을 보고 2005년 11월 부장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이전보다 급여는 20% 정도 높아졌다.

현재 천 부장은 MBA를 한 것에 후회가 전혀 없고 현재 업무에도 만족하고 있다.

“MBA는 방대한 양을 공부하기 때문에 사고의 폭이 깊어집니다.

돈이나 직책을 떠나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죠. 그렇지만 MBA가 인생을 확 바꿔주는 것은 아니에요. MBA는 어느 분야든 진입 장벽을 낮춰주긴 합니다만 그것을 뛰어넘는 것은 자기 몫이죠. 결국 먼저 목표를 분명히 정하는 게 중요해요.” ■Ⅲ. 8번 이직, 이직전문가 - 이규현 에이콴트 한국지사장■ HR전문기업 에이콴트 한국지사장 이규현씨(45) 이력서는 한 장이 모자랄 정도다.

직장 경력에 각기 다른 회사 이름이 8번이나 나온다.

이 사장은 사회학을 전공한 후 미국으로 유학 가 사회학 석사와 광고학 석사를 취득했다.

첫 직장은 광고대행사 제이월드톰슨(JWT). 한국인으로서 당연히 모국 광고시장 개척에 매력을 느낀 그는 JWT와 제휴한 광고대행사 나라기획에 입사, 한국에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1년 이상 경력을 다진 90년 7월, 마침 한국 광고 시장이 전면 개방되면서 그는 광고대행사 맥켄에릭슨의 전략기획팀장으로 스카우트된다.

광고와 영어를 둘 다 잘 아는 사람이 드물었던 덕에 쉽게 몸값을 높여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다소 생뚱맞은 제의를 받게 된다.

93년 금 마케팅 단체인 WGC(World Gold Council)의 한국지사장 제의를 받은 것. WGC는 금 마케팅 전문가들이 주축을 이뤄 금의 화폐적 가치를 알리는 게 주 임무. WGC는 당시 한국에서 금의 화폐가치가 인정되지 않아 투자상품으로서 금의 유용성을 알리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이 사장이 스카우트 대상으로 지목된 것은 외국계 광고대행사의 한국 시장 진출을 진두지휘한 경험이 높은 점수를 받아서였다.

한국인이면서 영어실력과 기획력을 동시에 갖춘 인물이란 점에서 적임자로 인정받았다.

이후 9년간 WGC 지사장직을 맡아 숙원과제였던 금 부가가치세, 수입관세 규정을 철폐하는 성과를 거둬냈다.

다시 광고대행사 레오버넷 기획담당 임원과 일진다이아몬드 자회사인 누브인터내셔널 대표, 이탈리아 명품 전문 디자인회사인 ‘스튜디오 주키 디자인’ 아시아 담당대표 등을 거쳤다.

올 1월에 8번째로 자리 잡은 곳이 다국적 HR기업인 에이콴트 지사장. 에이콴트가 광고와 홍보, 마케팅 등을 주업무로 하는 만큼 그의 다양한 이직 경력은 좋은 밑거름이 된다.

일반 직장인들보다는 잦은 이직에도 이 지사장이 경력관리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업무 경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한 일관성 덕분이다.

“사실 학부 전공과 어학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습니다.

첫 직장 경력을 잘 살리는 게 중요하죠. 외국계 광고대행사에 일하면서 공격적으로 한국 진출 마케팅을 했던 게 이후 성공적으로 이직과 전직을 할 수 있게 된 배경이라 생각합니다.

전 직장과 비슷한 업무면 가장 좋겠지만, 업무가 다르더라도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일이면 나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건 다양한 경험을 쌓는 거죠.” ■Ⅳ. 대기업에서 외국계 기업으로 스카우트 - 신현석 한국마이크로소프트 차장■ 올 2월 한국마이크로소프트에 둥지를 튼 신현석 차장(35)은 원래 ‘삼성맨’이었다.

94년 삼성에 입사한 뒤 군에 장교로 임관했다가 전역 후 96년부터 삼성SDS 유니텔 사업부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전산 개발자로 첫발을 내딛었고 유니텔이 마침 좋은 실적을 거두면서 일에 재미를 붙였다.

2002년 회사가 삼성네트웍스로 분리됐다.

인터넷데이터센터(IDC)서비스가 회사의 중요한 성장동력으로 떠오르면서 호스팅 비즈니스에 관심을 갖게 됐다.

마침 대기업을 비롯해 중소기업이나 개인, 상점들까지도 사이트를 만드는 붐이 일었다.

삼성전자 전사정보전략그룹 직원들과 함께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기반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이런 작업을 하는 동안 불현듯 그 동안 쌓은 노하우를 한 곳에서만 썩히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직을 결심하고 한 헤드헌팅업체에 이력서를 등록했다.

지난해 12월 마침 마이크로소프트 아·태 본부(Asia Pacific Region)에서 인재를 구해 면접을 봤다.

“외국계 기업에 입사한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죠. 인터뷰를 할 때도 깊이 있게 알지 못하면 답할 수 없는 질문이 많았어요.” 마침 이력서 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심층면접 준비도 해온 터라 전형에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가 맡은 Hoster Evangelist 업무는 일명 ‘IT전도사’다.

회사와 연관된 호스팅 업체를 대상으로 MS 제품, 솔루션을 알리는 것. “기술력, 친화력에다 커뮤니케이션 스킬까지 필요한 업무죠. 아시아 지역에 있는 각 호스팅 업체를 대상으로 MS의 솔루션 등을 알리고 각종 세미나와 온라인 교육 등 콘텐츠를 제공하는 역할도 합니다.

여러 조건을 필요로 한 만큼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그만큼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신 차장은 이직에 성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도전하는 자세’라고 말한다.

그 역시 오랜 고민 끝에 이직을 단행했지만 이직이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삼성에 근무하던 시절 인력개발원에서 10주 현지화 합숙과정으로 영어, 중국어를 준비했던 게 큰 도움이 됐어요. 또 지난해 1월부터는 매일 새벽 6시에 학원을 다녔는데 힘들었지만 역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게 해준 요인 중 하나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 ■Ⅴ.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 김광오 매그나칩반도체 선임연구원■ 반도체공학도 김광오 매그나칩반도체 과장(31)은 전자집적회로 제조업체 다윈텍에서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현실은 목표했던 것과 달랐다.

반도체칩 개발업무를 맡았는데 어려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투자비용이 최소 1억~2억원 이상으로 벤처기업에겐 적잖은 부담이었다.

실패할 경우 후유증을 떠안아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이 컸다.

벤처기업만의 자율성과 창의성 발휘도 막상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고. “칩 개발과정에서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복구기간이 4~6개월 이상 들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죠. 벤처기업이 감당하기엔 어려운 내용입니다.

게다가 벤처기업들은 코스닥 상장까지는 기술 개발에 매진하다 막상 상장하면 그때부터는 기술 개발에 소홀하게 됩니다.

맘 편히 정말 열심히 기술 개발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던 중 마침 매그나칩반도체에서 일하는 지인으로부터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냔 제의가 들어왔다.

매그나칩반도체는 2004년 10월 하이닉스반도체의 비메모리반도체 부문을 분사해 출범한 회사. 지난해 매출액 9700억원을 올릴 정도로 규모가 큰 회사라 그는 과감히 입사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물론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같은 대리급으로 옮길 경우 다윈텍 근무 당시보다 연봉이 1000만원가량 줄어들게 생긴 것. 다행히 협상 과정에서 과장으로의 승진이 결정되면서 연봉 수준을 맞출 수 있었다.

좋은 일은 겹쳐서 오는 것일까. 입사를 결정지은 후 갑자기 여러 회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근무하던 기업에서의 평판을 바탕으로 업계에 이름이 알려진 덕분이다.

특히 미국에 있는 한 메이저 반도체 업체에서는 연봉 10만 달러 이상을 제시하기도 했다고. 하지만 이미 매그나칩반도체와 계약을 한 터라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연봉이 ‘최우선 요소’가 돼서는 안 된다고 단언한다.

“여러 가지 외부적인 요인 때문에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기술 개발 업무에 매진한 게 수많은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수 있는 위치로 올라서는 데 최고 요인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또 자신이 하고 싶은 업무를 한다면 연봉은 덜 중요하다고 봅니다.

조건만을 쫓아가는 ‘메뚜기 이직’은 금물이에요. 엔지니어 수명이 사실 50대를 넘기 어려운 걸 감안할 때 이직만 하다간 시간만 흐르기 십상이거든요.”  

2006.05.24 10:50 입력